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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장(金天章)의 집안과 사충문(四忠文)

출생지 / 진천읍 사석리 775

◎ 규모: 2평 목조와류
◎ 시대: 조선 영조 12년(1736)

1728년 무신 3월에 역적 이인좌(李麟佐)의 무리가 청주를 점령하였다. 신천영(申天永)을 충청병사(忠淸兵使)로 권서봉(權瑞鳳)을 청주목사(淸州牧使)로 삼은 뒤에 청주를 수비하도록 하였다. 이인좌는 반역군을 인솔하고 북으로 가던 중에 진천 지방에 도착하였다.
진천 현에는 1727년 12월에 권흥준(權興俊)이 현감으로 도임하였다. 부임한지 몇 달이 되지 않기에 군내의 형편을 알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현에는 군관 9인과 사령 20명이 군사 관계를 맡고 있을 뿐이오 아무 군비조차 없었다. 별다른 준비도 없이 지내고 있던 중에 갑자기 역도들의 습격을 받게 되었으니 나가서 싸우지도 못하고 도망하고 말았다. 역도들은 무인지경을 헤매는 것처럼 진천을 점거(占據)한 후에 역적 이지경(李之璟)을 현감에 임명한 뒤에 진천 지방을 수비하게 하였다. 이인좌의 무리는 역도들을 인솔하고 안성 죽산 방면으로 올라갔다.
이지경은 현안에 앉아서 현감이라고 말을 하고 지방에 있는 청년들을 붙잡아서 역적의 무리에 들어가게 하고 군량미를 모집한다고 하여 민가를 돌아다니면서 곡식이나 재물을 빼앗아 갔다.
진천읍 사석리(鎭川邑士石里)에서 여러 대를 살아오던 김천주(金天柱) 김천장(金天章)은 아들과 조카를 불러 놓은 뒤에 평소에 품고 있던 이야기를 하였다.
“지금 나라의 형편을 살펴보니 매우 위태롭게 되어 있다. 역적의 무리가 청주를 점거한 후에 진천 지방을 제멋대로 흔들고 있으니 이렇게 아프고 분한 일이 어디에 있으리오, 군민들은 모두 일어서야 할 때라고 생각하는 중이다. 옛날부터 우리 김씨는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의로운 일이면 앞장을 섰고 불의에는 죽엄을 두려워하지 않고 항거하였다. 우리가 벼슬은 하지 않았기에 나라에서 월급을 받은 일은 없지마는 나라의 운수가 비색하게 된 이때에 어찌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가 있겠는가? 우 리도 역적들을 몰아내기에 앞장을 서야 한다.”
하고 동지들을 모은 뒤에 도끼, 쇠스랑, 칼, 괭이 등을 가지고 현아로 몰려갔다.
갑자기 당하는 일에 이지경은 너무 당황하여 안방으로 피신해 버리었다.
역도의 졸개들은 달려나와 백병전이 벌어졌다. 김천장은 진두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
“역적의 괴수놈은 빨리 나오너라. 나는 너의 목을 베어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으리라.”
하였다. 김천장은 용감하게 역도들과 닥치는 대로 메어치고 쇠스랑으로 후리치곤 하였다. 끝내는 역도의 군관 2명 군노 2명이 참살되었다. 그 동안에 여러 곳에 나누어져 있었던 역도들이 활과 칼을 가지고 몰려왔다. 사방에서 활을 쏘아대니 김천장은 눈, 가슴, 배 등에 화살을 맞고 피가 주룩주룩 흘렀다.
그러나 조금도 굽히지 않고 역도들과 싸우다가 10여 군데를 칼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다른 역도들과 싸우던 천장의 형 천주(天柱) 천장의 아들 성옥(聲玉)과 조카 성추(聲秋)도 많은 부상을 입었다. 얼굴이 깨어지고 손가락이 부러지고 다리가 부러졌다.
아들 성옥과 조카 성추는 쓰러져 누워있는 천장을 발견한 뒤에 달려드는 적도들을 막아서 싸우며 천장을 호위하여 아문 밖으로 나온 뒤에 물러나고 말았다. 천주, 성추, 성옥은 동지들에게 업히어 집까지 돌아왔다.
천주(天柱)와 성추(聲秋)는 그 날밤에 숨졌다. 천주는 아우 천장이 순사(殉死)하자 적과 싸우다 적의 칼에 맞아 거의 죽게 되었고 아들 성추는 천장이 순사하자 맨손으로 적도들이 흔드는 칼에 맞아서 온몸이 상처 투성이였다.
성옥(聲玉)은 아버지 천장이 순사하자 아버지 사체 옆에서 시체를 보호하면서 적의 칼을 막아내었다. 그러던 중에 전신에 칼자국이 심하여 집으로 업히어 온지 3일 뒤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인좌의 난이 평정된 후에 의병을 일으키어 순절한 사실을 조정에 알리게 되자 영조 대왕은 천장에게 증직으로 좌승지(左承旨)를 내리고 정려문을 건립하게 한 뒤에 제수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김성옥(金聲玉)에게는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정하고 증직으로 장사랑(將仕郞)을 내리었으며 천주, 성추에게도 복호를 명하여 세금을 면제받게 하였다.
그 뒤 고종(高宗) 22년 을유 1885년에 천주, 성추, 성옥에게도 김천장의 정려에 병정(倂旌)토록 하였으니 사충문(四忠文)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충문은 진천읍 사석리 삼거리에서 천안 방면으로 400m 쯤 가면 다리가 있고 그 다리 옆에 있다.
공들이 일으킨 의군들은 무기 하나도 없이 괭이, 쇠스랑, 칼, 도끼 등을 가지고 적들과 싸웠기에 「쇠스랑충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노송 그늘 밑에 의젓하게 서있는 사충문은 정의를 위하여 불의에 항거하다가 순절한 네 분의 거룩한 영령을 기리고 있다.

※ 자료 : 진천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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